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치바나 무네시게 (문단 편집) === 비참한 몰락 === 그뒤 [[세키가하라 전투]]가 발발하고, 서군 편에 섰지만 진로에 있던 오츠 성의 다이묘 쿄고쿠 타카츠구(京極高次, 1560 ~ 1609)[* 히데요시의 측실 중 한명인 마츠노마루(일명 교고쿠도노)의 오빠로, 이 때 오즈 6만석의 영주였다. 총 3천의 병력으로 무네시게와 고바야카와 히데카네(모리 모토나리의 9남)등이 이끄는 1만 5천군을 세키기하라 전투 전날까지 잡아두는 공적을 세워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와카사 8만 5천석과 오미 7천석, 합계 9만 2천석의 영주가 되었다.]가 동군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이곳에서 발목이 잡혔고, 겨우 쿄고쿠 타카츠구의 항복을 받아냈으나 세키가하라의 본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다. 세키가하라에서의 패배의 소식을 듣고서 [[모리 데루모토]]에게 '오사카성에서 결사 항전'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영지로 돌아온다. 무네시게는 자신의 영토에서 동군 세력(나베시마 군)에게 대항하여 결사 항전하였으나, [[구로다 요시타카]]와 [[가토 기요마사]]가 설득에 나선 끝에 문을 열고 항복하였다. 한편 시마즈 가문에서 원군을 보냈지만 무네시게가 항복한 후에야 도착했다. 항복한 무네시게는 목숨은 건졌으나 [[가이에키]](개역)당하고 평민 백수 신세가 되었다. 당시 무네시게의 처지는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거지나 마찬가지였는데, [[쌀]]이 모자라 가신들이 죽을 만들어 바치자 그 때까지 유복한 생활을 해 온 탓에 '밥을 할 쌀이 모자라 죽을 만든다'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(...) "물에 만 밥이 먹고 싶을 땐 알아서 물에 밥을 말 테니까, 이런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."고 화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. 하지만 모든 것을 잃고 이렇게까지 몰락했는데도, 가신들이 봉록도 못주는 걸인 신세의 주군을 떠나기는 커녕 오히려 잡기로 돈벌이를 하여 주군의 생계를 도왔다고 한다. 그 중 하나인 토토키 츠레사다는 허무승이 되어 동냥질을 했는데 우연히 폭력배 3명과 시비가 붙었고 그들이 휘두른 칼을 맨손으로 빼앗아 모두 죽여버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... 그 와중에 마에다 도시나가와 [[가토 기요마사]] 등 여러 다이묘들에게 가신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. 다만 잠깐 동안 가토 기요마사에게 식객으로 대접을 받으며 지내기는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